안동넷 | 맛있는집 | 문화관광 | 엔터테인먼트 | 포토팟 | 커뮤니티
뉴스 인터뷰/기고 칼럼 유쾌한 스토리 포토/만평 기사검색 기사제보/취재요청
아나키스트가 본 세상
한방칼럼
배옥의 고향편지
도연의 문화산책
안동의 인물
피재현의 雜感
이 풍진 세상
안동에 사노라면
음식문화지도
포토벨
> 안동뉴스 > 칼럼 > 안동의 인물
 
약포(藥圃) 정탁(鄭琢)
 

약포 정탁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이황(李滉)의 제자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정승의 자리에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높은 솜씨를 발휘한 대학자이자 명재상이었다.

정탁의 향리 예천군 예천읍 고평동과 류성룡의 고향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간의 거리는 30리다. 동향 혹은 동문으로서 친분관계는 잘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창황망조(蒼黃罔措)한 임란을 당하여 지혜를 기울이고 대의를 세워서 안으로는 국정의 위난을 수습하고 밖으로는 의적의 총칼을 물리치는 위업을 세운 점에서 가히 쌍벽이라 할 수 있다.

 >> 약포영정(藥圃影幀), 보물 제 487호 ⓒ문화재청 제공
1592년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침공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국도를 등지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평양에서, 영변으로 피난 갔다. 여기서 분조(分朝))가 결정되어 선조는 의주로, 세자(광해군)는 강계로 향할 때 류성룡은 왕을 따르고 정탁은 세자를 따르며 분골쇄신하는 마음으로 진충보국한 임란 극복의 주역들이었다.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을 추천 발탁한 사람이 류성룡이었다면 모함을 받고 죽음 직전에 놓인 이순신을 살려낸 사람은 정탁이었다. 또 정탁은 약포 용사일기(龍蛇日記)를 서술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오늘날 국보적인 문헌이 되고 있다.

국운이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붕당의 작폐가 기승을 부리는 난세에 구급광란(救急匡亂)의 지혜와 척사원정(斥邪援正)의 대의정신으로 공을 쌓고 덕을 세운 정탁의 본관은 청주다. 명현거유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16촌간인 그는 1526년(중종21) 예천군 용문면 버들밭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는 그가 8세 때 글을 배워 13때에 태음력(太陰曆)에 관한 이론인 기삼백기삭치윤법(朞三百 氣朔 置閏法)을 스스로 고안해 낼 만큼 총명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유년과 소년시절의 가정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는 식구를 데리고 처향을 떠나 안동군 와룡면 지내리로 옮겨갔다.

정탁이 20세 되던 해 그와 그의 가족은 다시 예천군 예천읍 고평동으로 되돌아왔지만 7년 동안 안동체류기간이 그에게 있어 학문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시기였다. 안동 거주 때 그는 동갑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을 만나 함께 절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7세에 퇴계를 찾았다.

그는 퇴계로부터 심학(心學)의 요체와 도학의 참된 뜻을 배우고 익혀 큰선비로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2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는 슬픔을 당했지만 그는 성현의 길을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만은 확고부동하여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기론(理氣論) 중심의 정통성리학 뿐 아니라 경학(經學) 지리(地理) 병서(兵書) 상수(象數) 등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는 고금의 팔진육화등법(八陣六花等法)을 깊이 연구한 덕분에 병학분야에 탁견을 가졌다.

 >> 약포사당(藥圃祠堂), 문화재자료 제142호 (예천군 황지리) ⓒ문화재청 제공
























그가 50여 년 간 벼슬길에서 큰 잘못 없이 지내며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슬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은 그의 폭넓은 학식과 대범한 성격의 덕이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떳떳이 맞서는 높은 기개와 강직성을 갖고 있었지만 일상생활 등 세속적인 것에는 초연했다. 한마디로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명종 때 문정왕후를 업고 서슬이 푸르던 윤원형(尹元衡)의 세도에 서슴지 않고 논핵했는가하면 붕당의 와중 속에서 동인에 속했던 그는 서인의 영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의 대범성을 나타내는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그가 23세 때 이웃 마을의 거제 반씨 규수와 결혼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아내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서울서 과거시험을 본다고 친정오빠들은 모두 그 준비를 서두는데 서방님은 어떻게 하실 의향입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정탁은 [여비가 있어야 길을 떠나지]하고 남의 말 하듯 흘려버렸다. 답답한 아내는 [그럼 공부는 웬만큼 되었습니까]하자 그는[아마 그런 것 같아]여전히 담담한 어조였다.

그의 아내는 평소 친정어머니가 동전 몇 닢을 주며 이것을 없는 듯이 모아두었다가 요긴할 때 사용하라는 돈을 내놓았다. 일설에서는 현숙한 그의 아내가 머리칼을 잘라 판돈으로 여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어쨌든 정탁은 그길로 서울에 올라가 대과에 합격했다. 금의환향하는 정탁의 모습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어사화와 어사대를 넣은 괴나리봇짐 하나를 멘 채 그는 어둠이 깔린 뒤에야 고향집에 들렀다. 이제나 저제나 남편의 성공을 초조히 기다리던 그의 부인은 표정 없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낙방한줄 알고 실망이 컸다.

봇짐을 내려놓은 정탁은 그의 아내에게 조상 묘에 고할 일이 있으니 처가에 가서 돗자리를 빌려오라고 말했다. 이때서야 그의 아내도 남편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눈치 챘다고 한다. 선비가 대과에 급제하면 반드시 홍문관 승무원, 성균관 교서관 중 어느 한 곳에 들어가 일정한 수습교육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이중 홍문관은 으뜸직이고 교서관직은 말미로 쳤다.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 보물  제494-2호, 광해군(光海君) 5년(1613)
정탁에게 위성공신을 추증(追贈)한 교서 ⓒ문화재청 제공

정탁은 처음 교서관에 배속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불우함을 동정 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이때 수렴청정으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당당했던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는데 사용하기 위해 교서관의 향을 가져오게 하였다. 마침 향실의 숙직을 담당하고 있던 말단직의 정탁은 (교서관의 향은 종묘사직의 제사에 쓰일 뿐 궁외로 가져 갈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노발대발한 문정왕후는 형조에 명을 내려 정탁을 엄하게 다스렸으나 이일로 오히려 그는 강직한 선비로 이름이 높아져 뒷날 요직을 역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번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 두복야가 실수하여 죄를 짓자 이여송이가 그를 참수하려했다. 마침 정탁이 이 사실을 알고 이여송에게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고 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 두복야는 은혜를 갚기 위하여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지방의 명당10곳을 적어 정탁에게 주었다. 이 소문은 알게 모르게 퍼져 전국의 내노라하는 풍수가들이 두복야가 선정했다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예천지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지금까지 한군데만 밝혀지고 나머지 9곳은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재(才) 학(學) 식(識)의 삼장재(三長才)를 갖춰야 될 수 있다는 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정탁은 유현보다는 명신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정탁은 퇴계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동시에 사사(師事) 한 많은 사람 가운데 정승의 자리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황의 문인 중 류성룡, 이산해 등이 정승을 역임했으나 조식과 인연이 없었고 조식의 문인중 정인홍이 정승직을 누렸으나 이황과 사우관계를 못 맺었다. 그의 족제(族弟) 정구가 영남좌도의 퇴계학과 영남우도의 남명학을 통합성취한 대현이었는가 하면 정탁은 영남 좌, 우도의 학통을 바탕하여 경세제민의 훌륭한 치적을 쌓은 정치가였다. 그는 이황으로부터 심오한 학문과 인(仁)의 요체를 바로 배운 탓으로 사생활등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언제나 너그러웠다.

이와는 달리 정탁은 조식으로부터 기개 높은 정신과 대쪽같이 고고한 의(義)를 터득한 때문에 명분에 어긋나는 불의를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대의에 입각한 철저한 명분론자로서 공사의 구별이 엄정했고 파당에 초연했다. 사생활에서의 그는 비록 하인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 결코 큰 소리로 꾸짖는 일이 없지만 공직생활에서의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예컨대 윤원형 일당의 비정을 논핵하고 문정왕후의 개인의 청을 단호히 물리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선조 22년 일본사신 현소가 와서 화의를 청하자 정탁은 “섬나라 일본은 본래 교활한 민족이온데 이제 새삼 화친을 구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변란이 있을 징조이니, 조정은 화친론을 물리치고 국방강화에 진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이었으니 그의 뛰어난 안목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예견대로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칠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왕과 세자의 피난길을 따르며 국란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난리 북새통 속에서도 조정대신들의 논의가 분분하자 그는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마음을 합쳐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어찌하여 당파로 갈려 한결같이 서로 헐뜯느냐]며 대갈 하였다. 그는 풍부한 경륜을 쌓은 노신답게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고 국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대의에 맞게 했다.

 >>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보물  제494-5호 ⓒ문화재청 제공

69세에 우의정이 된 그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유정(惟政), 한백겸(韓伯謙), 박명현(朴名賢) 등 출중한 인재를 추천하여 대란극복의 일익을 담당토록 하였다. 또 그는 이러한 인재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이를 시기한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위기 때마다 변호에 앞장섰다. 호남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덕령이 사소한 실수로 체포되자 명장을 죽이면 막대한 국가의 손실이라며 그를 구해냈다.

김덕령이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아 다시 구속되자 이때도 정탁은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치열한 당쟁의 결과이므로 수포로 돌아갔다.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1차 국문(鞠問)을 견뎌내고 2차 국문을 받게 되는 운명에 놓이자 정탁은 저 유명한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를 올렸다.

조선조 국문은 너무 잔인 하여 한번으로 죽거나 병신이 되는 것이 통례인데 항우 같은 천하장사도 2번의 국문은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순신은 참으로 장수의 재질을 가졌고 해전과 육전의 재주를 겸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지 못 할 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크고 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이옵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해서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하여 공과 허물을 서로 비겨볼만한 점도 묻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만한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또 그간 사정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면 공있는 자와 능력있는 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해 더 애쓰지 않을 것 입니다”

이 글은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의 일부분으로 정탁이 국가장래를 위하여 얼마나 인재를 아꼈는가를 알 수 있다. 한편 그는 왕세자를 보필하면서 피난길의 상황과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고 환송한 일 또 그들과 주고받은 문서 등을 기록한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을 지어 선조에게 바쳤다. 이 책은 당시의 군사, 정치, 외교,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이와 별도로 후일 그는 용사일기(龍蛇日記)를 저술했다. 용사일기의 내용은 용만문견록을 바탕으로 재편집한듯하다. 용사일기의 원본은 약포유물각에 비장되어있는데 이것이 가지는 사학적가치가 풍부할 뿐 아니라 국어학적 가치와 서도사적 가치도 아주 높다는 평이다.

 >> 약포선생문집 ⓒ유교넷 제공




















국어학적 가치는 이두문체(吏讀文體)의 기록이 많아서 이두어휘가 풍부하므로 중한 자료이다. 용사일기를 필사한 사람은 정탁의 셋째아들 윤목(允穆)이었다. 정탁은 73세에 기로사(耆老社)에 드는 영예를 얻었으나 이내 중앙정계를 떠나 향리 예천으로 돌아와 고평동에 터를 잡았다.

이때 그의 심정을 읊은 퇴거시를 남겼다.

어려울 때를 구제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이 풍진세상을 분주히 돌아 다닌지 그 몇 해던고/
7년 대란을 만나 한가지의 좋은 계책도 없이/
백발이 된 몸으로 고향을 찾으니 부끄러움만 남네

산촌벽지에서 몸을 일으켜 80평생을 진충보국에 최선을 다한 노신의 심정이 잘 나타난 것 같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고평동계(향약)를 만들어 주민을 교도하고 고평들을 개간하여 복지증진에도 힘썼다. 만년에 조용한 시간을 얻은 그는 성리학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리할 각오로 초록주서(抄錄朱書)와 소학연의(小學衍義)를 집필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관직생활 때문에 그의 문하에는 황여일(黃汝一), 황지(黃遲) 등 극소수의 제자만 있다. 숙종 26년 향내 사람이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 도정서원을 세워 정탁. 윤목 부자를 향사 고종 때 훼철령을 받았으나 신기하게도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았다.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그의 영정. 용사일기. 기로연도. 용사잡록. 교지 등 많은 유품은 지난 80년에 고평동에 세워진 약포유물각에 잘 보존돼있다.

 >> 예천청주정씨재실, 정탁을 기리고 제사지내는 곳. 시도유형문화재 제315호 (예천군) ⓒ문화재청 제공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2008-07-28 오후 5:42:27 / 김성규 객원기자
©2023 andong.net
2008-07-28 오후 5:42:27



| 독자의견 - 총 0 건의 독자의견이 있습니다.

성명 비밀번호
자동입력방지
99005
좌측 박스안의 숫자를 입력하세요.


이메일 인쇄 퍼가기 글자크게 글자작게
 
안동넷 경북 안동시 단원로 89 4층 로그인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서인
전화 : 054-843-5700, 054-856-5544, 팩스: 054-843-5701